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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하여   -  아름다움에 대한 칸트의 이론과 그것이 이후의 예술이론과 실천에 미친 영향

 

글쓴이 : 김동훈 교수 / 한국예술종합학교

 

 

 

칸트에 따르면 미적 판단은 주관적 판단이다.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에 관한 판단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아름다움의 본질을 즐거움에서 찾았고 근대 미학의 출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18세기 영국의 취미론자들도 대부분 아름다움의 본질을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긍정적인 변화에서 찾았다.

 

 데이비드 흄같은 이는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아름다움은 사물들 자체 안에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관찰하는 정신 안에만 존재하며, 각각의 정신은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지각한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곳에서 다른 사람은 추함을 느낄 수도 있다. [] 실재하는 아름다움이나 실재하는 추함을 발견하려는 것은 실재하는 단 맛이나 실재하는 쓴 맛을 주제넘게 알아내려 하는 것만큼이나 무익한 시도다. 신체기관들의 특성에 따르면 동일한 대상이 달콤하면서도 쓸 수 있다. [따라서] 취미에 관해서는 논쟁이 부질없다는 어떤 격언의 결론은 정당하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더 이상 대상의 객관적 성질이 아니었다.

 

 칸트도 이런 견해에 동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그렇지 않은지 분간해내기 위해 우리는 [대상의] 표상을 오성을 사용하여 인식 대상에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 상상력을 통하여 주체에, 그리고 주체의 쾌() 혹은 불쾌(不快)의 감정에 연결시킨다.” 그렇다고 칸트가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현상이라고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아름다움을 대상에 내재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어떤 형식적 특성과 결부시켰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무목적적 합목적성의 형식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처음 듣고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꽤나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칸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개념이 어떤 대상의 원인(그것의 가능성의 실재적 근거)으로 간주될 때, 그 대상이 그 개념의 목적이다. 합목적성은 어떤 개념이 그러한 대상과 맺는 인과관계다.” 예를 들어 씨라는 개념이 있다고 치자. 씨는 나중에 커다란 나무가 존재하게 될 가능성의 실재적 근거다. 씨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무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씨라는 개념의 목적은 나중에 존재하게 될 대상, 즉 나무다. 꽃이 어떤 존재자인가에 대해서는 아마도 식물학자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식물학적 지식에 따르면 꽃은 풀이든 나무든 어떤 식물의 종족번식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꽃이라는 개념은 계속 번식하게 될 풀이나 나무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생물학적 해석에 따르면 꽃이라는 개념의 목적은 새롭게 번식하게 될 풀이나 나무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풀이나 나무가 종족번식을 위해 꽃을 피웠다는 사실 때문에 그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식물학자도 한 떨기 장미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는 그 꽃이 존재하는 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목적적이라는 표현에 담겨 있는 의미다.

 

합목적성의 형식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앞서 살펴본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합목적성이라는 말은 우선 꽃이 종족번식의 목적에 합당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런 경우 합목적성은 목적 달성에 적합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을 갖는다. 그와는 달리 명시적 이목적 발견되지 않음에도, 혹은 목적에 명시적으로 주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어떤 목적에 부합하는 것 같이 보이는 형식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이 무목적적 합목적성의 형식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장미꽃에서 발견되는 매우 잘 갖춰진 형태는 종족보존의 목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교한 형태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는 어떤 목적 때문에 장미의 모습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만든다. 이러한 형태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긍정적인 감정의 변화를 칸트는 아름다움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과 지난 글에서 설명한 아름다움의 특징을 합하여 정의해 보자면 아름다움은 무목적적 합목적성의 형식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무관심적인 즐거움이다. 그런데 얼핏 생각하면 무관심적이라는 말과 무목적적이라는 말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언급한 대로 무관심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상세히 알아봄으로써 이 표현과 무목적적이라는 표현 사이의 의미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보도록 하겠다.

 

우리말로 무관심적이라 번역된 독일어는 interesselos라는 형용사다. Interessse라는 명사는 영어의 interest와 같은 어원을 지닌다. ‘사이에라는 뜻을 지닌 inter존재하다, 있다를 뜻하는 동사의 원형 esse(독일어 단어의 경우)3인칭 단수 현재형 est(영어 단어의 경우)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어떤 것과 다른 것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해관계라는 말이 되거나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관계를 성립시켜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자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관심’(關心)1이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마음을 쓰게 되면 둘 사이에 일종의 관계(關係)가 형성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장미꽃의 아름다움이나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무관심적이라는 말을 장미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1). 칸트가 사용하는 특수한 용법과 구분하기 위해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관심이라는 단어를 따옴표(‘ ’) 안에 넣어 사용하기로 하겠다.

 

 

칸트는 자신이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는 관심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관심은 우리가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관념과 결부시켜 얻게 되는 만족(Wohlgefallen)을 일컫는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어떤 긍정적인 감정을 얻게 되는 경우 그것이 바로 관심이라는 것이다. 쾌적한 사물의 경우는 그 사물이 존재하거나 존재한다고 믿어야만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배가 너무 고픈 상황에서는 상상으로 산해진미를 떠올린다 한들 내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의 경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거나 적어도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야만 우리는 거기서 어떤 감동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경우에는 어떤 대상의 실제 존재와는 상관없이 그 대상에게서 어떤 특징만 확인하게 되면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실제의 꽃이든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묘사된 꽃이든 일정한 형태만 갖추게 된다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관심을 갖지 않으면, 즉 대상에 주목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아름다움과 관련된 긍정적 감정은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관심자체가 미적 만족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관심은 아름다움이 발생하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대상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형성되거나 대상에게서 무언가 마음에 드는 특징을 발견했을 경우다. 칸트는 이런 의미에서 무관심적이라는 말을 관심이 없다,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2. 하지만 관심(關心)이라는 한자어도 말뜻 그대로 풀이하면 관계 지어진 마음 정도의 뜻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해관계도 당연히 포함될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번역어를 찾기보다는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한 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된다.

 

 대상에게 주목한 상태에서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특징을 대상에게서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면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특징이 바로 무목적적 합목적성의 형식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를 토대로 구분해 보자면 무관심적이라는 표현은 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 내면의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 무목적적 합목적성의 형식은 대상에서 발견하게 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렇듯 아름다움의 본질을 무관심적인 태도를 지닌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긍정적인 감정과 연결시키기는 했지만 아직 대상의 성질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대상의 존재목적과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대상에서 발견되는 일정한 특성을 아름다움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거의 전적으로 인간의 주관적 태도를 통해 설명하려 하는 이론을 미적 태도론이라 부른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가 일정한 마음의 태도를 취하게 되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전개과정에 대한 자세한 고찰과 분석은 20세기 이후 예술 감상자가 예술이론과 실천에서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과정을 다룰 때가 적합하다고 생각되기에 그때로 미루기로 하겠다.

 

다른 한편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이나 감동이 칸트의 주장처럼 도덕적 선에 대한 욕구나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나 감동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면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도 도덕적 종교적 욕구나 본능적 욕구의 해결을 추구하는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이로써 예술은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나 사회규범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아름다움의 추구가 진리에 도달하는 최고의 방법이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낭만주의를 거쳐 예술을 위한 예술, 유미주의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계에 몰고 온 엄청난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숭고가 20세기 들어 현대예술의 화두가 되는 배경을 다루면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겠다.